주어진 것, 변하는 것, 남게 되는 것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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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수유 리테일은 많은 조건들 속에서 시작되었다. 대지는 도로 확폭으로 줄어든 39평의 면적에, 건축한계선 이격이 있는 2개의 도로에 면했다. 다행인 점은 서측 인접대지의 공공건축물이 전면을 공지로 비웠기 때문에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방향으로 3면이 드러나는 돌출된 대지 형상이었다. 저층부에서는 코너스톤과 같은 견고한 인지성의 형태를 만들 수 있었고 상층부에서는 열린 조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인근은 역세권 상권으로 번잡한 먹자골목의 분위기이나, 바로 맞은편에는 76세대의 공동주택이 고층으로 서있었다. 출퇴근길의 주민부터 친구와의 저녁식사를 찾아헤메는 사람들까지 여러 유형의 보행흐름이 예상되는 바, 가로에서 어떤 인상으로 드러날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건축주로부터는 요구가 있었다. 우선은 통상의 임대수익형 건물처럼 최대용적의 최대전용률을 원했으며, 공간활용에 방해가 되는 중간기둥이나 막힌 외벽이 최소화된 개방감있는(인근의 모든 통창 임대건물들이 대부분 간판이나 현수막으로 가로막혀있었으나) 전용공간을 원했다. 독특한 점은, 모듈러 제조회사를 운영하는 건축주가 시범사업적 목표로서 철골모듈러공사를 포함한 8층 이상의 공사를 요구한 것이다. 상업지역이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고도와 연면적의 상방제한은 열려있었으나, 지하 주차는 고려하지 않는 상황이므로 1층의 주차대수가 전체 연면적을 정했다. 허용된 규모 속에 주차, 소방, 장애인 법 등의 요구를 적절히 조율해내는 결단이 곳곳에 필요했다. 모든 층의 분리 임대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임대성이 있는 적절한 전용면적을 확보하면서 공용면적은 줄이고, 모든 부분의 개방감은 확보하는 최적화된 설계가 진행되었다.
모듈러 시공을 경험해온 건축주는 횡하중을 견디는 구조적 해법으로서 코어를 철근콘크리트공사로 하고 나머지 부분을 모듈러로 공사하는 것을 제안했다. 일부 유사사례가 있기는 했으나 담당 구조기술사와 검토결과 여러 발생가능한 문제들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으로도 시공 상의 어려움이 예상되었기에, 건축주의 요구를 전제된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본 계획에 착수했다.
기술
모듈러건설기술은 시장에서 OSC(OFF SITE CONSTRUCTURE)를 통해 공사비를 절감하고 공사기간을 줄이는 공법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노하우가 누적된 시간은 짧고, 특히 이 프로젝트와 같은 폭이 좁고 층수가 5층 이상인 민간건축물의 사례가 많지 않다. 모든 건축현장이 그렇겠으나 몇가지 기술적 해법에 대한 요구가 발생했다.
첫째는 모듈의 크기와 방향을 구조적 전이층은 없도록 하면서 개방감있는 입면을 확보해야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듈의 운송규격에 제약을 받는다. 도로규격 및 운송 차량의 특성으로 각각의 모듈 폭과 높이는 3.2m이내여야 하며, 길이는 10m 이상도 가능하지만 인접 도로의 굴곡에 영향을 받는다. 결론적으로, 대지는 3면이 열려있으나 그 중 한쪽 면은 적어도 3.2m이하의 간격으로 기둥이 생긴다. 되도록 나머지 두 개의 면에 개방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듈을 1면씩 캔틸레버 방식으로 계획하였다. 이로인해 후속 문제가 발생했는데, 비대칭 하중이 되면서 인양방식이 까다로워진 것이다. 이 부분은 시공 검토 상 필요 시 캔틸레버 처리된 코너부에 인양용 기둥을 추가하는 것으로 시공계획을 세웠다.
코어를 철근콘크리트 공사로 분리하면서 두가지 고민이 생겨났다. 첫째는 시공 시점이 상이한 두 구조의 연결이고, 둘째는 그 사이의 단열과 방수이다. 철골모듈 간의 연결은 검증된 특허기술들이 있으나 콘크리트와의 연결은 아직 검증된 기술이 없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콘크리트 공사의 층간 벽체위치의 정확성이었다. 국내 현장공사의 척박한 실정 속에 층별 오차는 전층에 걸쳐 5~10cm로 예상되었다. 이를 미리 감당할 버퍼를 만들어둬야 했다. 단열과 방수는 코어부분을 외기에 노출시키며 전용공간인 모듈 부분과는 완전 분리를 시켰고 자연히 단열방수의 기준선도 모듈측으로 확실하게 포함시키며 해결해나갈 수 있었다.
표현
돌출된 형상의 대지로부터 대칭의 입면을 떠올렸다. 복잡한 환경속에서 오히려 일관되고 정갈한 인상으로 차별화되길 원헀고 1층에서는 자유롭게 오가는 인파의 움직임이 형태로 반영되기를 바랐다. 표현의 욕구가 수많은 조건들을 정리해나갔다. 주어진 조건이었던 구조방식의 구분은 자연히 매스의 구분으로 이어졌다. 저층부의 방수문제를 고려해 1층이 철근콘크리트공사로 편입되면서, 습식공사가 기단부와 수직지지대로서 바탕이 되었고 재료 성격도 스터코로 통일하며 그 성격을 그대로 따랐다. 그에 비해 모듈부는 조립식의 패널과 커튼월로 정리하여 가벼운 구조적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도록 했다.
모듈러에서 가장 고민되는 문제는 자유롭지 못한 이음부의 배치와 기술-디자인적 해결이다. 현장공사의 모듈사이 오차는 약 50mm 까지 예측되었고, 그 모듈 간격은 운송가능한 모듈 크기에서 정해진다. 구조 모듈이 입면의 모듈이 되는 것은 건축에서 자연스러운 질서이나, 구조의 제약이 입면의 제약이 되는 것은 방임하고싶지않았다. 야마모토 리켄의 강남 보금자리 주택에서의 세대 구분을 흐리는 입면디자인이 떠올랐다. 구조 모듈을 입면의 분할 속에서 억지로 가리지 않고 자연스레 숨기는 카모플라주 방식이 고려되었다.
모듈의 배치를 정하며 평면이 가로세로 6.8m 가량의 정방형 비례가 되었다. 이 크기가 최대 층고인 3.4m의 모듈구조와 맞아떨어졌고, 입면디자인 정리의 키가 되었다. 층고를 3등분한 1130mm가 기본 모듈이 되어 입면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3등분한 층고는 난간벽 – 수평유리창 - 수벽부로 정돈되었다. 수벽은 커튼월을 연속하되 반투명유리로 처리했다. 이에 따라, 모듈의 층간 이음부는 외장재인 금속패널과 커튼월유리가 단차를 두고 만나게되는데 그 단차깊이에서 모듈이음부는 숨게 된다. 모듈간 수평 이음부는 의도적으로 이음매나 돌출 루버를 1130mm 단위로 추가하면서 입면에 통합시켰다. 각 요소(금속패널, 유리, 커튼월바, 돌출캡)는 모두 200mm의 단차 속에 자유롭고 정갈하게 자리잡았다.
남게되는 것
아쉽게도 프로젝트는 지어지지 못했다. 조건에 충실했으나 상황은 변하였고, 기술은 사전에 검토되었으나 실행단계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여러 아쉬움이 남는다. 수평적으로 두가지 구조를 갖는 것은 공사기간에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해법에 대한 논의는 건축, 구조, 시공 모두 쉽사리 서로를 설득해내지 못했다. 실무적인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한계로 보였다. 새로움을 시도할 때는 가장 원초적인 직관에서부터 귀납적인 인식을 뛰어넘는 도전이 필요함을 여실히 느꼈다. 여기에는 ‘보다 싸고, 보다 빠른’ 모듈러 건축에 대한 인식이 장애물이 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금번에 진행한 일종의 사고실험이 다음 시도에는 든든한 토대가 되어, 보다 나아간 결론에 다다르길 바란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단순한 시공 경제성을 넘어서 모듈건축의 완성도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런 프로젝트에서 디자인이란 보기 좋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기보다 모든 측면에서 매끄럽게 정리된 일정 기준 이상의 완성도를 성취하는 문제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간단한 방수처리의 문제나 내화의 문제도 공법이 정리되지 못하여 건축안전을 충분히 담보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고, 설계단계에서 이를 조율하기 위한 많은 시간 투자가 있었다. 점차 현장공사가 어려워지는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후발 시공 참여자들은 단순히 경제성만을 쫓기보다 새로운 시장의 표준이 될만한 완성도를 미리 갖춰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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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조건과 제약 속에서 우리가 하고싶었던 것은 회의 테이블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무언가였다. 흥미로운 점은, 견고할 것 같은 조건은 앞서 얘기하듯 상황에 따라 변하며, 완벽할 것 같은 검토는 다음 단계의 주체들과 재논의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변치 않는 것은 연결고리 없는 조건들 사이에서 스스로 설정한 어떠한 목표였다. 이 목표의 설정이 어쩌면 건축을 해가는 과정에서 건축주와 건축가가 가장 긴 시간 열고 대화해야 할 나침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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